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원복집 사건 (문단 편집) == 발단 == [[1990년]]의 [[3당 합당]]으로 [[대경권|TK]]+[[부울경|PK]]+[[충청도|충청]] vs [[전라도|호남]]의 유리한 지역 구도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데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집권 여당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를 선출한 [[노태우]] 정부의 여당 [[민주자유당]]으로서는 손쉬운 선거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2년 3월에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또 다시 뒤엎고 친여 무소속+[[통일국민당]]의 선전으로 인하여 민자당은 의석 수가 대폭 줄어들어 의석 과반수(150석 이상)를 불과 한 석 차이로 확보하지 못하는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당시 민자당의 전국 득표율이 38.5%, 민주당은 29.2%, 통일국민당은 17.4%였고 기타 신정당·민중당 등이 3.3%를 기록했으며 이마저도 군인표 부정이 아니었으면 130석대로 의석수가 떨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올 판에 영남권에서조차 민자당의 득표율이 과반을 넘긴 곳은 부산 딱 한 곳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민자당을 탈당한 무소속 당선자 일부가 선거 이후로 민자당으로 복당하여 국회의석 과반을 겨우 채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민자당은 차기 대선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1992년 5월 [[김영삼]]이 당권 장악에 이어 대권 후보로까지 결정되었지만 민정계의 기반인 [[대경권|TK]] 지역에서 반(反)YS 정서가 퍼져 안심할 수 없었다. 1990년 [[3당 합당]]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는 사실상 민주계-민정계가 따로 논다고 봐도 될 정도로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으며, 14대 총선에서도 대구에서 민자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통일국민당이 28%의 득표를 획득하고 2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등 선전하였다. [[서구 갑(대구)|서 갑]]에서는 친여 무소속 [[정호용]]이 과반으로 압승하면서 민자당 [[문희갑]] 후보는 30%에도 못 미치는 득표를 기록했으며 대구에서 얻은 민자당 득표율이 부산에서 얻은 득표율보다 낮았다. 그나마 경북에서의 민자당 득표율은 경남에서의 득표율보다는 다소 높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무소속이 상당히 선전하여 14대 총선에서의 민자당 참패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정호용]], [[강재섭]], [[김용태(1936)|김용태]], [[이상득]], [[김윤환(1932)|김윤환]], [[금진호]] 등 김영삼을 지지하기로 한 [[민정계]](이른바 '''신''' 민주계) 일부 인사들은 대선 때 [[대구광역시|대구]], [[경상북도|경북]] 지역을 돌며 "유일한 대통령감은 '''김영삼뿐'''"이라며 같은 경상도 정서를 드러내며 유권자들에 지지를 호소했다. 사실 이때부터 민자당은 지역주의를 이용하여 영남권의 표 결집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PK]] 지역도 [[부마민주항쟁]]의 사례[* [[김영삼]]의 최대 지지 기반이었고 가장 '''믿을 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부동층, 민주 세력 지지층, 호남 이주민, 젊은 층들의 표심을 알 수 없었던 데다 3당 합당 후 여당 세력에 야합한 김영삼에 실망한 여론도 있었고 1992년 총선 당시 부산에서 민자당이 압승을 거두기는 했다만 득표율은 51.8%로 민자당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수준은 아니거니만 민주당과 국민당, 민중당을 합친 득표는 1/3에 육박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으로 돌아갈 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사건 이후 여론이 결집하여 70% 이상 지지를 보내줬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권 교체의 목소리가 언제 터질지 몰라 아무래도 불안했던 데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여러 불리한 조건에서도 지지율 1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오면서 [[김대중]]과 지지율 격차가 크게 줄어든 데다 [[울산광역시|울산]](당시 경남 소속)과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정주영]]의 지지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녹취록에서도 전통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해 온 [[전라도]]에서조차 정주영이 경제를 들고 오니 김대중의 인기가 시들하고 정주영 인기가 높다고 걱정하는 발언들이 많이 나오며 그 유명한 [[영도대교|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 드립은 만약 부산도 정주영을 지지한다면 그때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는 뜻으로 나온 말이었다.] 실제로 대구, 경북 지역의 반YS 정서를 간파하고 대선 구도 제3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정주영이었는데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후 [[김복동]], [[박철언]], [[유수호(정치인)|유수호]][* [[국민의힘]] [[유승민]] 前 의원의 아버지다.]를 위시한 민정계 인사[* 민정계 인사들은 1992년 대선을 기점으로 행보가 갈렸는데 [[김복동]], [[박철언]] 같은 노태우의 친인척들은 통일국민당으로 갔고(다만 노태우의 동서 [[금진호]]는 민자당에 잔류해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김윤환(1932)|김윤환]], [[정호용]], [[최병렬]] 등은 민주자유당에 잔류했다. [[이종찬(1936)|이종찬]], [[장경우]] 등은 [[새한국당]]을 창당했다가 이후 통합민주당을 거쳐 다시 김대중 중심의 [[새정치국민회의]]와 [[이기택]] 중심의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으로 갈라졌다.]는 물론 심지어 [[김광일]] 같은 민주계 인사들까지 대거 영입하여 경상도 표심을 노렸다.[* 대선 직전 김광일은 정주영의 당 운영을 비판하며 탈당했고 대선 후 민자당으로 되돌아가 YS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